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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던지고
나중에 생각 한다

다섯 번째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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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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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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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ESSAY
0702

이번 주엔 노트에 적어둔 게 없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고자 한다.

지난주에 류진선 님께서 편지와 함께 작은 수첩을 선물로 주셨다. 저번 2주차 아카이브에서 내가 일기를 쓰다 엉엉 울었다는 얘기를 썼었는데(그걸 왜 썼지?), 그다음 수업에서 정정은 님께서 내게 왜 울었는지 여쭤보셨다. 나는 이러저러한 말들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얘기였지만 딱히 숨길 것도 없는 그런 얘기였다. 문화라운지 영에는 공유 주방이 마련되어 있고, 그곳은 산으로 간 배 쉬는 시간에 담소를 나누는 곳으로 쓰인다. 월식 선생님께서 늘 그곳에 간식을 올려놓아주시기 때문이다. 나와 정은 님은 그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우연히(라고 표현하기에도 뭣하지만) 진선 님께서 그 대화를 들으셨다.

다음 주에 진선 님께서 한 장의 편지를 건네주셨다. 조그만 수첩과 함께.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스타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내가 받은 수첩이 나왔다. 인벤타리오라는 문구 판매 행사에 대해 소개하는 게시글이었다. 작은 수첩은 그 행사에서 가장 핫한 제품이었다고 한다(진선 님은 지난번 절약해오기 숙제를 소개할 때 인벤타리오에 갔다고 이야기해 주셨었다. 3주차 아카이브 참조). 이 귀한 것을 내가 받아도 되는 것일까? 나는 이것을 지혁 님이 주신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사이즈가 딱 들어맞는다.

진선 님께서 주신 수첩 (방이 더러운 것은 눈감아주세요)

이날은 산으로 간 배 말고는 일정이 없어서 문화라운지 영에 일찍 도착했다. 두어 시간 정도 일찍 왔는데, 최태규 님이 먼저 와 계셨다. 태규 님은 지난주에 못 오셔서 조 공개 발표를 보지 못하셨는데, 내게 그날 썼던 PPT를 공유해달라고 요청하셨다. 함께 할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외워두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지 않는 편이 좋으실 텐데요, 하고 나는 PPT를 보여드렸다. 조 공개 발표가 있기 전에, 주성진 선생님께서 PPT에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넣어 더욱 극적인 연출을 하도록 요청해 주셨었다. 하지만 산으로 간 배에서 단체 사진을 찍거나 하지는 않았었으므로, 나는 활동 증빙용으로 찍은 사진에서 참여자분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확대해서 옮겨 붙이는 수밖에 없었다. 옆모습만 나오거나, 멀리 있어서 흐리게 나온 사진 등 결코 잘 나왔다고는 할 수 없는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하필 태규 님의 사진은 좀 더 이상하게 나온 데다가 얼굴만 크게 확대된 모습이었다. 태규 님은 매우 탄식하시며 얼굴 사진을 빼고 공유해 줄 수는 없냐고 말씀하셨다. 마침 주성진 선생님의 요청이 있기 전에 만들어두었던 사진 없는 버전이 남아 있어서 공유해 본다.

뒤이어 오신 이창민 님, 나비와 함께 넷이서 수다를 떨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멘토 선생님들 세 분 다 일찍 도착하셨고, 박지혁 님은 늘 일찍 오시는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박지혁 님의 필통을 구경하게 되었다. 지혁 님은 엄청난 문구 오타쿠셨다. 지혁 님의 큰 필통 안에는 샤프, 볼펜, 만년필이 가득 담겨 있었는데, 그 필통 하나만 해도 무려 15만 원짜리라고 했다. 그 속엔 지우개 똥이 지우개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지우개, 세상에서 가장 검은 잉크가 나오는 볼펜 등 신기한 것들이 아주 많았다. 문구점에서 서커스단을 만든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중에서도 매우 필기감이 좋은 펜 한 자루가 있었는데, 내가 볼펜 사진을 찍고 있자 김월식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소정! 그거 살 거면 내 것도 하나.

주말에 동네 문방구에서 그 펜을 마주쳤다. 한 자루에 이천몇 백 원, 볼펜 치고는 비싼 가격이었다. 나는 두 자루를 구매했고 월식 선생님께 한 자루 드렸다.

소심하게 도촬해본 월식 선생님의 모습과 펜

모여서 얘기를 좀 나누다가 회식하러 문화라운지 영 바로 옆에 있는 옛날 통닭집에 갔다. 조별로 모여 앉도록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고, 나와 나비는 구석 테이블에 왕따처럼 앉게 되었다. 갑자기 서른 명 넘는 사람들이 다닥다닥 모이게 되니 기가 쫙 빨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좋을 텐데 하면서도 아무 생각이 안 나서 말없이 치킨을 먹었다. 나비는 내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싶었다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이 팀 저 팀 돌아다니며 무슨 얘기를 하는지 관찰하고 받아 적었을 텐데, 심신이 너무 피로해지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다. 아키비스트의 직무 유기다.

치킨으로 에너지가 조금 보충되고 나서야 나비에게 사주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난 조 배정 발표에서 혹시라도 시간이 부족할까 봐 나비의 사주에 대한 설명을 빼고 PPT를 만들었었다. 나비의 사주 풀이 한 문장은 개인적으로만 알려주었는데, 그 의미에 대해 해설해 주며 겨우 대화의 물꼬를 텄다. 옆에서 근학 님이 복비는 받고 사주 얘기해주는 거냐고 물었다. 그치만 스몰 토크에 사주만 한 게 없걸랑요… 나는 스몰 토크에 영 소질이 없다. 우주적으로 현학적인 빅 토크가 차라리 수월할 정도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은 소개팅 같은 자리에는 적합하지 않을 게 틀림없다. 예전에 애인에게 나는 한 번도 소개팅을 해본 적이 없어서 너무 궁금하다고 징징댔더니, 애인이 그 자리에서 소개팅 시뮬레이션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도 별로 소개팅에 적합한 인물은 아닌 듯했다. 우리는 얘기할 거리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 떠도는 ‘사랑에 빠지는 질문’ 따위를 찾아보았다. 첫 번째 질문은 ‘이 세상 누구와도 저녁을 함께 먹을 수 있다면, 누구를 택할 생각인가요?’였다. 그땐 2024년 여름이었고 나는 윤석열이라고 대답했다. 되게 유명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긴 한데, 영어 스피킹에는 자신이 없으니까 한국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면 대통령 정도가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참고로 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조금의 정치적 견해도 없이 각자가 주는 인상에 대해서만 따져보자면, 왠지 이명박은 내게 쌀쌀맞게 대할 것 같고(다 말해주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 박근혜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울 것 같았다(목소리가 노곤노곤한 느낌을 준다). 노무현은 괜찮아 보였지만, 소개팅에서 대뜸 노무현을 언급하면 수상해 보일 것 같았다. 그 이전의 대통령들은 내가 근현대사를 잘 몰라서 대화하기 어려울 것 같고, 그나마 고른 시의적절한 인물이 윤석열이었다.

왜 이런 얘기를 쓰고 앉아 있지? 이날 술을 먹어서 그런지, 술에 취한 기분을 되살려 아무 말이나 쓰게 되는 것 같다. 많이 마시긴 했지만 필름이 끊길 만큼 무리한 것도 아니었는데,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나마 기억나는 것들에 말해보자면, 옆 테이블인 김월식 선생님 조에서 바람(윈드wind가 아니라 치팅cheating)에 대해 열띤 논쟁을 했다는 것. 특히 정순보 님이 화가 많이 나 보였다. 그냥 목소리가 크셔서 그렇게 보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술을 매우 좋아하시는 우창효 님께서 하필 술 마시는 사람이 별로 없는 팅 조에 배정되셔서 매우 외로워하셨었다. 아, 그리고 거의 끝나갈 때 즈음 내가 말실수했던 일도 기억난다. 무슨 상황에서였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장차 뭘 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공부가 적성에 맞는지 아니면 예술이 적성에 맞는지 대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그런 상황이 대체 왜 생겼지?). 나는 인문학적인 얘기를 좋아하지만, 직업으로서 학자의 길은 영 아닌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반면에 예술은, 현시점에서는 계속해볼 만한 것 같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는 얘기. 나의 이런저런 가치관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는 제쳐두고, 매우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예술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다. 간단하게 비교해 보자면, 일곱 시간 동안 공부하는 것보다는 일곱 시간 동안 창작을 했을 때 훨씬 내가 덜 소진되는 느낌이 든다. 물론 둘 다 매우 힘든 일이지만 서로 다른 종류의 힘듦이고, 지금의 내겐 후자가 좀 더 견딜만하게 느껴진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나는 이 모든 얘기를 ‘공부하는 것보다 예술 할 때가 힘이 훨씬 덜 든다’고 압축해 버렸다. 이것은 심각한 오해를 유발하는데, 두 가지 힘듦의 질적인 차이를 양적 차이로 환원시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매우 문제적인 그 발언은 내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예술인들을 비하해버린 듯한 결과를 초래했다. 만일 상처받으신 분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를 드립니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NOTE
다들 그날 잘 들어 가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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