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은 최태규 님의 염려스러운 한 마디로 시작되었다.
하늘에 구멍 뚫린 듯 비가 오는 아침이었다. 마침 고사리 팀은 김월식 선생님의 개인 사정으로 비대면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다. 팅은 해파리 팀도 비대면으로 만날 것을 제안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시골에 살고 있는 팅이 영등포까지 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소라 팀 또한 태규 님의 끈질긴 설득으로 비대면 수업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날이 갰다. 이 모든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활짝 개었다. 세상이 한 톤 밝아보일 정도로 맑은 햇살이 여기저기 쏟아졌다. 하지만 최태규 님의 염려는 끝나지 않았다. “또 비가 오면, 팅쌤이 집에 못갈수도 있습니다 ㅎㅎ.”
고사리 팀 🌿
지난 주 쯤, 멘토 선생님들의 요청에 의해 세 팀의 단톡방을 만들었다. 가장 활발하게 이야기가 올라온 곳은 고사리 팀이었다. 모든 분들이 활발하게 아이디어를 제시해 주셨다. 하지만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그 의견들이 다소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았다. 새로운 의견이 올라올 때마다 월식 선생님께서는 정성스러운 잡도리를 해 주셨다. 하지만 참여자분들께서 카톡만 보고 월식 선생님의 어려운 말씀을 다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답답하셨는지 또다시 잡도리 시간을 가지신 다음, 내게 전화를 하셨다. 월식 선생님께서는 내게 피드백을 올려달라고 말씀하셨지만, 사실상 잡도리를 부탁하신 것이었다.
나는 내가 이해한 월식 선생님의 말씀들을 좀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해 보려고 했다. 아래는 내가 고사리 팀에 공유했던 피드백이다.
월쌤께서 피드백 올려달라고 요청주셔서 몇 자 적어봅니다.
우리가 손쉽게 ‘남’을 위한 기획을 떠올릴 때는, 사실은 ‘나’를 첨예하게 바라보기 어려워서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심오하게 복잡한 내가 아니라, 뭉뚱그려놓은 남을 상상하고 그를 위해서 이것저것 아이디어를 떠올려보며 내 욕망을 투영하는 것이죠.
하지만 월식 선생님께서는 내 욕망을 똑바로 바라보기를 요구하십니다. 뭉뚱그려놓은 남을 위한 기획은, 뭉뚱그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기획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지금껏 월쌤과 함께 일하며 귀동냥을 해온 바, 목적을 첨예하게 노려보는 기획일 수록 매력적인 기획이 되는 것 같습니다. 월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섹시한’ 기획이요.
물론 내가 아닌 타자를 대상으로 하는 기획도 매력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대상이 충분히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대상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록 ‘대상화’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도시인’은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매일 경기도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 대중교통에서 하루에 세 시간씩 낭비하는 사람’처럼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기획적인 상상이 더 풍부하게 추가될 수 있습니다. 길 위에서 버려지는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중교통에서 할 만한 실천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매일 서울로 가야 하나? 망할 서울놈들이 경기도로 오게 할 수는 없을까? 아예 회사를 경기도로 옮겨버리는 기획도 가능할까? 등등.
한편, 뭉뚱그린 타자를 기획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욕망도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다 담기지 않는 ‘나’의 고유성을 대충 그어놓은 선 안에서 자유롭게 풀어놓는 것이죠. 그런 기획이 어디까지 ‘섹시해질’수 있는지는 제 부족한 식견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기획을 섹시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같은 기획 초심자들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이 짧은 산으로간배 과정에서는, 나의 욕망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것이 차라리 더 쉽습니다.
예전에 월쌤과 함께했던 다른 기획 과정의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프리 허그’ 기획 아이디어를 제안하셨던 분이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월쌤의 반응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분께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처음 보는 행인은 껴안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오늘 집에 가서 저희 아버지는 못 안아드릴 것 같아요. 아버지가 몸이라도 아프시면 모를까, 그냥 아무 날도 아닌 날에 K-장녀인 제가 경상도 출신 아버지를 껴안는 일은 매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본다면, ‘경상도 출신 부모님을 둔, 한국인이면서 집안의 첫째인 2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가지 기획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한 가지 팁을 드리겠습니다. ‘기획’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막연히 생각하지 마시고, 요즘 내가 꽂혀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으니, 여러분들은 눈치 보지 않고 ‘나’에 관한 TMI를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음껏 아무 얘기나 공유해주세요.
+ 요즘 내가 꽂힌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하다 보면 기획이 나오는 것 같더라구요 ㅎㅎ. 자유롭게 아무 얘기나 해주셔도 될 것 같아요(제가 책임 집니다). 예를 들면 자꾸 신경쓰이는 사람 뒷담화를 해주셔도 돼요. 전남친이 자꾸 생각난다면, 이별한 사람들을 모아서 전애인 뒷담화 까기 기획을 할 수도 있죠 ㅋㅋ
줌 수업에 들어갔을 땐, 김월식 선생님께서 또다시 잡도리 타임을 가지시는 중이었다. 월식 선생님께서는 톡방에 올라온 여러 아이디어들에 대해, 기획에서 '참여자'들을 먼저 상정하는 것이 문제적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고사리 팀의 숙제는 ‘바람, 물, 불, 흙, 습도, 온도라는 매체를 사용해서 관계를 만들어보기’였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쉽지 않은 숙제다. 모두들 이 숙제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대화가 잘 진행되지 않자,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모든 기획이 개인의 서사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시며, 참여자분들께 ① 해야 하는 것, ② 하고 싶은 것, ③ 잘 하는 것을 나누어 생각해 보기를 요청하셨다.
정순보 님께서는 하고 싶은 기획으로 ‘민낯 대화’를 제안해 주셨다. 가식과 방어기제, 상호 존중 없이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순보 님은 예전부터 ‘불편하지만 진짜인 관계’를 추구해왔다고 말씀해 주셨다. 투박한 이웃이 예의바른 남보다 더 좋은 것 같다며, 그런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솔직하게 날것의 이야기를 다 해보고 싶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에 대해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다시 한 번 참여자를 먼저 상정하고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이미 ‘일베’ 같은 데서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덧붙이셨다.
김월식 선생님께서는 남들의 ‘참여’를 고민하지 말고,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만 이야기 해보라고 말씀하셨다. 먼 곳이 아니라, 내 삶을 관통하는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해 주셨다.
순보, 잘 하는 게 뭐야? 월식 선생님께서 물어보셨다. 순보 님께서 대답하시길, ‘얕은 친구 사귀는 것’을 잘하신다고 한다. 이걸 듣고 월식 선생님께서는 ‘졸라 멋있네’라고 평해주셨다.
월식 선생님께서는 같은 질문을 황윤중 님께도 물어보셨다. 윤중 님은 ‘들어주는 일’을 잘 하신다고 대답하셨다. 정말로 윤중 님은 카톡방에서도 줌 수업에서도 늘 가만히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지켜보고 계셨다. 월식 선생님께서는 윤중 님이 좋아하는 것을 물어보셨다. 윤중 님 왈, “연애요.” 하고 싶은 것은? 역시, “연애요.”
박귀숙 님이 좋아하는 것은 ‘글쓰기’였다. 하고 싶은 것은 ‘영등포를 유명한 문화도시로 알리기’였다. 좀 신기했다. 나는 살면서 한 번도 어떤 지역을 ‘유명한 문화도시’로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월식 선생님께서는 귀숙 님께 ‘너무 착하게 사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전부터 월식 선생님께서는 착해야 된다는 강박을 버리는 대신 유머를 시도해볼 것을 강조해 주셨다. 하지만 고사리 팀은 월식 선생님의 기대보다 훨씬 더 착한 사람들의 모임인 것 같았다. 나는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여러분은 살면서 해본 가장 나쁜 짓이 무엇인가요? 박소연 님께서는 부모님 몰래 비행기표를 끊어놓고 출국 당일 말씀드렸던 적이 있다고 얘기해 주셨다. 아니, 그게 나쁜 일인가? 부모님 돈을 훔쳐서 여행가는 것도 아닌데... 한편, 정순보 님은 어디까지 말해도 되냐고 물어보시면서, 아직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아서 말씀드릴 수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셨다.
소라 팀 🐚
지난 주에 소라 팀은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고 한다. 순서대로 류진선 님, 박상현 님, 정정은 님의 메모이다.
이때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주성진 선생님께서 미리 숙제를 내 주셨다.
소라 팀 과제(?) 리마인드
나를 닮은/ 나를 담은 글 공유. 기획서를 써 본 사람은 기획서를 포함. 여러글 난사 대환영. 일기/수필/시/낙서... 장르 불문. 사진이나 동영상 활동모습 등도 대 환영 > 우리 팀 구성원/ 내가 어떤 사람들이 다른 팀원들이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팀플 기획 아이디어 투척도 대환영!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참여자분들의 부끄러움을 덜어주시기 위해 ‘나 다운 글’들을 먼저 공유해 주셨다.
나 다운 글 1: 전환 순간의 논리 (주성진)나 다운 글 2: 기획자노트 (주성진)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이 글들을 보내주시면서 기획 아이디어도 하나 투척해 주셨다.
뒤이어 참여자분들께서 각자의 나 다운 글들을 공유해 주셨다. (제목을 클릭하시면 글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박상현, 「잠 안 와서 걷는 밤 산책」박상현, 「산으로 간 배 신청서」
호종해, 「산중호글 008호」
박상현, 「건강한 소통을 위한 기-승-전-결 대화법」
류진선, 「태양서 색이 변하는 신묘한 12알 손가락 염주」
류진선, 「마셔보면 못 헤어나올걸? 다시 돌아온 인생 티타임 PALETTEA」
류진선, 「류모씨의 이야기(와장창!)」
홍동민, 「산으로 간 배 기획서」
정정은, 「벽의 문학적 채집기」
정정은, 「산으로 간 배 기획안」
홍동민, 「프로그램 계획안_북촌도락」
김지영, 「자기소개」
김지영, 「2026년 7월 2일 목요일」
김지영, 「소논문 등재」
김지영 객원기자, 「코로나 확산 원인」
2-6 김지영, 「길」 (교내 백일장 운문부 차상)
최태규, 「생필품이 아닌 물건들 발표」
나는 먼저 고사리 팀을 돌아보고 난 뒤에 소라 팀 수업에 참여했다. 들어가자마자 주성진 선생님의 깜찍한 비주얼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주성진 선생님께서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내게 혹시 술 드시고 오셨냐고 물어보셨다. 평온한 말투와 귀여운 비주얼의 조합에 웃음을 더욱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소라 팀은 불참자가 많았다. 아까 비대면 수업하자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태규 님까지 안 오시다니... 다행히도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다시 접속하니까 태규 님을 포함해 아까 보지 못했던 많은 분들이 와 계셨다.
대화 주제는 ‘먹고 사는 것’ 그리고 ‘가정 불화’였다. 어쩌다 이런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셨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여러 개인적이며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참고로 다음 주 수업날이 호종해 님의 생일이라고 한다. 소라 팀 지각자가 한 명도 없으면 주성진 선생님께서 한 턱 쏘신다고 하는데, 과연 성사될 것인가!
해파리 팀 🪼
해파리 팀은 이날 수업을 하지 못했다. 팅이 사는 동네인 가평군은 폭우가 쏟아지면 종종 인터넷에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대신 해파리 팀은 토요일에 보충 수업을 했다. 나는 이날 개인적인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하였다. 대신에 참여자분들께서 올려주신 기획 아이디어들과 팅의 줌 수업 요약문을 첨부해 본다.
해파리 마을 (박건영)길치는 길을 잃지 않는다 (박은진)
오늘 줌은 해파리 은유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 만들기 기획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팀은 각 팀원이 독특한 방식으로 영등포를 탐험하고 인지할 수 있는 서로 다른 감각 촉수(시각, 청각, 촉각)를 대표하는 해파리 세계관 내에서 그들의 작업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논의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단순히 지도를 따르는 것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도시를 읽어내는 개념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었습니다. 그룹은 두뇌 없이 신경 조직만 분포되어 있는 해파리의 특성이 문화적 계획 접근 방식과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지 논의했으며, 경직된 구조보다는 직관적인 흐름과 연결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팀원들은 각자의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더욱 발전시키고 '촉수 교환' 메커니즘을 통해 협력할 방법을 고민하여, 다음 주에 오프라인으로 만나 프로젝트 기획을 계속 구상할 계획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대면으로 만날 수 있기를!